보스턴리걸(Boston Legal)과 조국의 시간

2021. 6. 15. 23:37더불어살기

미국 드라마 가운데 법정물을 좋아하는데, 특히 보스턴리걸을 매우 좋아합니다.

늘 아웅다웅하는 두 주인공이 서로 다른 견해에도 불구하고 '존중'하고 우정을 나눈다는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법이 규범학이라는 점을 이 드라마는 특히 더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규범학.

진리의 영역이 아닌 사회적 현상과 사건 등에 대한 사회적 해석과 처리에 대한 것을 정의하는 학문이라고 풀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가?

태아는 사람인가?

뇌사자는 살아있는 사람인가? 죽은 사람인가?

사형제도는 옳은가?

 

이런 물음에 대한 적절한 선을 찾아 내는 것이 규범학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판단과 선택의 영역이지요.

 

'보스턴리걸'은 각 에피소드에서 이런 규범학적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도발을 합니다.

드라마 '더 프랙티스'에서도 다른 내용들이 제법 있습니다만, 풀어가는 방식이 좀 더 가볍습니다.

거기에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 '데니 크레인(윌리엄 샤트너, 스타트랙의 커크선장 역)'과 '앨런 쇼어(제임스 스페이드)'의 저질스런 농담이 한 몫합니다.

 

'보스턴리걸'을 통해 제임스 스페이드의 연기에 놀라서 그가 나온 드라마를 적잖이 찾아보기도 했네요.

 

가볍게 법정물을 접하고 법의 규범학적 성격이 갖는 모호함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즐기기에는 굉장히 좋은 드라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 글은 '조국의 시간'이란 책 때문에 쓰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그 책을 페이스북에 올린 어떤 이가 '불필요한 댓글은 사양합니다'라는 글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 댓글을 남기려다가 불필요한 댓글로 인해 오랜 인연에 영향을 끼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고,

그런 다른 생각에도 불구하고 '존중'과 '우정'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 보스턴리걸이 떠올랐습니다.

 

고백하자면, 아주 친한 이가 '조국의 시간'을 카카오톡으로 올린 걸 보고 참지못하고 화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친하다는 이유로 '존중'을 하지 못하고, '우정'만 생각했던 거였죠.

튼튼한 '우정'이란 집에는 '존중'이란 주춧돌이 필요한데도 말이죠.

 

조국의 시간을 읽지 않았지만, 저는 조국의 태도가 못내 마뜩치 않습니다.

 

고백하건데 유시민이 조국부부의 아들 대리시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오픈 북'이라며 강변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윤리의식을 바닥까지 내려버린다며 쌍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형사체계가 아무리 개판이고 적폐투성이라고 해도 세간의 이목이 저렇게 쏠린 사건에서 그렇게 많은 혐의가 유죄로 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재심사건들을 보며 허술한 형사체계를 이야기 하지만, 그런 사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지 못한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형사법에서 유죄를 받으려면 일단 자백만으로는 유죄를 선고할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증거가 제출되고 그 증거는 위법하게 수집되지 않았어야 합니다. 위법한 수집이 아닐 뿐만아니라 전문증거(진술서, 진술조서) 등의 수사자료들 역시도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을 인정받습니다.

 

그리고 증거가 증거로 쓰일 수 있게되고 나서야 각종 수사와 진술 등을 맞춰서 믿을만한지를 확인받고(신빙성이라고 하고 증거력이라고도 합니다) 종합해서 판단을 한 결과가 유죄로 나옵니다. 당연히 '애매하면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에 기초해서 합리적인 의심이 있으면 유죄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합리적인 의심은 검찰의 증명에 대해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만 제시를 해도 유죄로 선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조국은 검찰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법정에서 진술하겠다고 하고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여론전을 펼치고는 정작 법정에서는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고, 유죄판결이 난 사안에 대해서 책으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확정판결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아마도 유일한 전략은 스모킹 건 역할을 한 증거인 컴퓨터에 대해 위법한 수집증거라며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가게 되겠죠.

 

위법한 수집증거로 증거능력을 부정당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 컴퓨터를 통해서 누군가가 조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이 어려울 겁니다.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형사적인 틈을 파고 그 전제를 날려버리는 방법. 미국 어디선가 본 사건이 떠오릅니다.

 

사실 저는 조국이 법무부 장관에 오르는 것에 대해 염려하는 정도였지, 이렇게 그 가족들을 둘러싼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설마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제가 조국을 염려한 건 그의 형사법적 세계관이 한국 현실에 비춰 터무니 없는 점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과거에 쓴 논문들에서 굉장한 불편함을 느꼈는데, 지나치게 미국적 형사체계에 대해서 호의적이란 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검찰제도가 군부독재시대의 하수인 노릇을 한 사실은 어김없고 이른바 이명박근혜 시절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작동하지 않은 점은 우리 시대의 불행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검찰은 문민정부와 참여정부, 촛불정부에는 어김없이 거악들에 대해 나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극히 짧은 소견이고 근거가 부족한 가설일지 모르지만 일본이 부패한 세력을 정치권에서 청산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검찰이 형편없는 수준에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키무라 타쿠야가 주연이었던 '히어로'라는 드라마에서 검찰은 제가 우려하는 검찰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키무라 타쿠야는 검찰의 각성을 촉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튼 저는 팬덤과 선동에 휩쓸리는 듯한 불안을 '조국의 시간'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검찰을 악마화 해서 해체시켜 놓고 난 뒤의 침묵은 세상이 맑아져서가 아니라 살충제에 따른 생태계가 파괴되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증(傍證)'. 곁에서 발생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암시하는 증명말입니다.

 

조국이 얼마나 나쁜지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조국에 대한 해석이 다르더라도 '존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어쩌면 이글은 조국에 발끈하며 '존중'을 잃어버린 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네요.

 

다만 불편을 이유로 대화를 않고, 존중에 깃대 각자가 '믿음'의 영역으로 도피하는 상황이 서글프다는 점은 어쩔수가 없는 듯 합니다.

 

어차피 대화는 끊임없이 서로의 편견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말만 남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래저래 조국의 시간은 참 불편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이 책을 추천하거나 사진을 올리는 분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 지는 쉽지 않은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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